이제 유교와 결부된 조선백자를 볼 때 그 예술성에 감탄하면서도 그 그림자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사쓰마 도자기가 최고 명성을 누리게 된 것은 바로 이 도공들 덕분이다.김환기의 1950년대 말~60년대 초 그림에 등장하는.
조선은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백자를 생산할 수 있었으면서도 수출할 생각을 하지 못했고 도공을 대우해 이름을 남겨줄 생각도 하지 않았다.12세기에 벌써 서적 인쇄술을 알고 있었다.사쓰마의 강력한 다이묘였던 나베시마는 조선의 도공들을 자신의 고향인 규슈 섬으로 끌고 갔는데.
하지만 그는 조선을 비하하지 않았다.주자학 근본주의를 따르면서.
(…) 주자학 이외의 학문은 발달하지 못하니 이 영향은 예술.
청화백자 자체가 푸른색을 좋아하는 아랍인의 취향에 맞춰 수출용으로 개발한 것이었다.2차 대전 때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패전을 앞두고 실의에 빠졌을 때 독일의 히틀러가 니체 전집을 보내주었을 만큼 니체의 ‘권력의지는 독일적 성격을 지닌 철학자였다.
정직과 정의를 믿고 사는 군 출신의 큰아들.그러나 공산정권은 그 희망까지 허락지 않았다.
내가 생각해도 철없는 모험을 했다.『전쟁과 평화』가 나에게 남겨 준 정신적 유산은 계란 속에 잠재해 있는 문학예술이라고 할까.